빗나간 증오의 대상 by 젊은노인

 1차 세계대전 중 프러시아(독일), 스코틀랜드(영국), 프랑스의 부대가 대치했다. 위치는 아마도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어디쯤인 듯 하다. 참호를 파고 서로 죽고 죽이며 대치하는 동안 추운 겨울이 왔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그들의 긴장은 계속됐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에 아름다운 노래를 매개로 해서 이들은 잠시나마 서로 전투를 정지하기로 했고 함께 노래하고 미사를 드리고 수다를 떨며 술을 마셨다. 서로를 죽여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던 이들은 친구가 됐고 휴전이 끝난 후에도 서로를 죽이지 못했다. 국적만 다를 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인간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여행자의 신분으로 만나 바에서 술 한잔 하며 친구가 됐을 사이였기 때문이다.

이런 잠시의 평화를 깬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한 젊은이었다. 쏘라는 명령에도 차마 상대에게 총을 겨누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 이 젊은이는 증오에 불탄듯한 표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 젊은이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영화의 시작부분에 특별히 비춰진다. 내성적인 성격의 착실한 젊은이, 차라리 소년으로 보이는이 젊은이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속에 자리잡은 성당에서 얌전히 성모마리아상에 물감을 칠하고 있었다. 이때 형이 와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희망차게 전하며 우리의 인생에서도 드디어 뭔가 신나는 일(somthing hot)인 전쟁이 났다는 '반가운' 소식에 기꺼이 참전했던 이 젊은이가 전쟁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이 젊은이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던져졌고 전투중 프랑스군의 총에 그의 형을 잃는다. 총에 맞은 형을 등에 업고 도망치던 그는 결국 그 형을 포기하고 심한 죄책감과 상실감에 빠진다. 그리고 프랑스군에 대해 맹목적인 복수심을 키운다.

모두가 친구가 되었던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이 젊은이는 마음을 열지 못했다. 친구가 되자고 접근하는 프랑스군인을 그는 칼을 내밀었다. 그에게 프랑스군인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오직 적이었다.



형의 죽음 이후 그의 눈은 살기로 번뜩였다. 조연으로 카메라가 비춰진 길지 않은시간 동안 언제나 그러했다. 친구가 되었던 그들이 다시 적으로 대치했을때 차마 서로를 쏘지못했던 잠시간의 평화를 깰 때도 그는 그러했다. 아마도 그의 총에 맞은 프랑스 군인들의 친구도 가족도 그렇게 영국인을 원수로 삼으며 복수를 다짐했을 것이다. 이렇게 증오는 피를 먹으며 성장한다.

그에겐 그러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신의 형을 죽인 프랑스군. 그에게 프랑스의 군인이란 무조건 죽여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갚음으로서 그러한 복수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충격에 빠져 옳고 그름에 대해 신경쓰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전쟁에 참여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본다면, 프랑스 군인은 왜 그의 형을 쏘았을지를 생각해본다면, 프랑스, 독일, 그리고 전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그의 그러한 증오는 안타깝다. 또 위험하다.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상황의 전장에서 많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때로는 사명감에 적을 죽이지만 그 죽음은 증오를 낳고 키운다. 그래서 인류 역사의 증오는 스스로 진화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분노를 자양분 삼아서 말이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의 어린아이들(초등학생처럼 보인다)이 텅빈 교실에서 적국에 대한 적개심을 웅변한다. 아직 자신의 가치관도 세계관도 뚜렷하지 않을 정말 어린 학생들이 비장한 각오로 적의를 드러낸다. 듣는 이 없는 텅빈 교실만큼이나 그들의 증오는 공허하다. 그들의 증오는 대상이 되는 나라이름만 다를 뿐 다르지 않다. 결코 억울한 증오도, 결코 정당한 증오도 없는 것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먼 나라 이야기인가.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도 많은 이들이 북한을 두려워하고 북한을 증오한다. 북한은, 북한 사람은 북한군은 증오의 대상이며 복수의 대상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북한 사람에 의해 죽은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적으로서 원수로서 어려서부터 북한을 배웠다. 하물며 북한에 의해 가족을 친구를 잃은 자들은 어떠할까.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그들의 맘을 이해하지 못할것은 아니다. 전쟁이라는 두려움을 주는 그들을 증오하는 맘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엉뚱한 곳에 증오의 총구를 겨누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성찰이다. 설사 전쟁이 나서 내가 살기위해 누군가를 죽인다고 해도, 그것이 정당방위라 해도 그 복수의 공허함과 비극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 비극을 강요하는 게 무엇인지. 그것이 사람인지 구조인지. 전쟁을 일으키고 반복하게하고 증오가 스스로를 진화하게 만드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진정 분노한다면 그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곧 2010년의 메리크리스마스가 다가오지만 한국은 여전히 메리하지 못하다. 연평도의 포격사태 발발로 심란하던 밤 이 영화를 보았다. 아름다운 하모니와 여러가지 소소한 이야깃거리는 이영화를 보는 것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들의 1박 2일의 평화가 이 지구상에 영원히 계속되는 메리한 날을 꿈꿔보며, 또 꿈이 아닌 현실이 되길 바라며 이 영화를 많은이들에게 권한다.

영국의 신부가 참전하는 젊은이들에게 설교한다. "민간인을 죽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어린양이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독일인을 모두 죽이십시오. 그래야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평화가 아닌 전쟁을 주러 오셨습니다."(설교 내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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