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없는 사회 by 젊은노인

이모집에서 이틀간 사촌동생 시험공부를 봐줬다. 과학과 사회를 봐줬는데 덕분에 르네상스와 유럽의 근대화, 중국의 근대화에 대해서 쭉 정리를 할 수 있었다. 학교다닐때 사실 근현대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닥 열심히 보지 않았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 기회에 그쪽을 보면서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냥 같이 보자고 펼쳐본 도덕책도 의외로 쏠쏠한 내용들이 있었다. 양심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도덕판단과 도덕적 신념에 대해서 읽고 도덕책 참 좋네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중학생들 공부도와주러가서 시간죽이면서도 나름 즐겁고 유익한 부분을 찾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 잘못하면 어떤 환경이든지 스스로 즐기고 의미를 찾으면 좋은 기회가 된다는 일반화를 시킬 수 있기에 위험한 것 같다.

틈틈이 이반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를 읽었다. 이 책은 박홍규씨가 번역하고 해설한 것인데 책의 거진 반이 해설이다. 그냥 딱 보고 든 생각은 이건 이반일리히의 책이기도 하지만 박홍규씨가 하나 쓴 책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싶은 말이 많으셨던 것 같고 좋은 말들이었다.

솔직히 이 책은 잘 안읽혔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사실 내가 어릴적부터 막연하게 해왔던 생각들과 너무 잘통해서 반가웠던 부분도 많았지만 말이다. 나랑 친한 사람들은 내가 그런말을 하는 것을 많이 들었을것이다. 난 누구한테 강의듣는걸 싫어한다. 공부는 언제나 내가 책을 읽어서 하거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하는거다. 그러니 학교 수업같은건 별로 필요하지도 즐겁지도 않다. 공부는 내가 즐겁게 무언가를 알고자 할때 한다. 누가 시켜서, 누가 이끌어서 하지는 않는다. 특히나 점수를 얻으려, 점수를 얻어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어떤 점수를 획득한다던지 과정을 통과하려 하는 공부는 질색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더 다른점이라면 하기 싫을땐 절대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나의 얘기를 관두고 일리히의 얘기로 돌아가서. 일리히는 학교교육이 어떻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 않는다. 그에게 문제는 학교교육 자체이다. 학교에서 어떤것을 어떻게 누가 시키든지 그것을 학교라는 제도로서 누군가 정해진 과정을 따라 모든사람들이 공통되게 통과해서 그 기간과 그 성과와 자격을 통해서 공인을 받고 또 어떤 자격을 획득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냥 표현에 신경쓰지 않고 대충대충 써놓고 있어서 정확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공부는 학교에서 가서 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생각, 공교육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 일정 수준의 교육과정을 마쳐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인식 그리고 제도, 공교육이 문제이니 대안학교나 대안 교육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등등 일리히에게는 모두 부질 없다. '교육'이라는 단어자체, 즉 누군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결국 공부는 스스로가 참여에 의해 하는 것이다. 이건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읽으면서 현대사회의 두가지 모습이 떠올랐다. 하나는 무너진 공교육, 그리고 인터넷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그저 학교를 열심히 다녀서 아주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동영상 강의를 듣고, 학원수업을 듣고, 과외를 받아야 한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학교는 내게 지식을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었다. 공부는 학원에서 하거나 집에서 혼자 했다. 학교가서 나는 자습조차 하지 않았다. 숙제나 했으면 모를까. 다음시간에 걷기때문에 쉬는시간에 급히 하는 숙제가 공부가 될 것이라 생각치 않는다. 학교는 나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평가하는 곳이었다. 아니다 사실 문제집만 풀어도 평가는 스스로 할 수 있다. 학교에서 받는 평가는 '공식'평가이다. 결국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의 단편을 사회적으로 계량화된 수단으로 등급을 매기는 곳이었다 나에게 학교는.  많은 상위권의 학생들이 이렇지 않을까. 학원에서, 과외선생님에게서 배우고 스스로 알아낸 것을 학교에서 등급매겨지는 것이 오늘날의 학교의 모습이 아닐까. 하위권이라면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공부를 하지 않을테네 학교가 교육기관으로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너는 매우 부족한 지식을 갖고 있는 등급의 사람이란 걸 공인받는 곳일 뿐이 아닐지.

나름 학교에서 의미있었던 것을 돌아보면 학교에서 운동을 정말 많이 했던 것. 학교 도서관이나 학급문고에 가서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과학실험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 등이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사실 운동은 방과후에 동네친구들과 더 많이 했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면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책 또한 나는 집이나 도서관에서 많이 읽었으므로 그것이 반드시 학교는 아니어도 될 것 이라 생각한다. 중학교때 난 과학을 잘해서 과학실 열쇠를 선생님께 받았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실험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때도 실험을 꽤나 많이 했고 대학교에서도 실험실에 들어가 해보고 싶은 실험들, 읽고 싶던 논문들 실컷 읽었다. 농담처럼 우리학번 등록금은 내가 다썼다고 할만큼 많은 양의 시약들을 써가면서 말이다. 나에게 있어 학교는 별 의미가 없었다. 학교안에서의 반드시 학교가 아니었어도 내가 했을 행동들, 공부들이 의미가 있었으면 모를까. 이러한 과학실 도서관 운동등의 교육적 효과는 일리히가 제시하는 공부망에서도 충분히 재현될 수 있다. 아니 더 잘 될 것이다.

어쨌든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교현실에 대한 비판은 아니니 너무 길게는 언급하지 않겠다. 오늘날 공교육이 붕괴하고 사교육이 성장했으니 일리히가 말하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가 이내 접었다. 결국 우리가 사교육을 받는 이유는 지식을 함양하고 자신이 알고 싶은것을 공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국가에 의해서, 또 어떤 자격에 대해서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닌가.

인터넷은 일리히가 구상한 공부망과 꽤나 유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관심사를 입력하고 같이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텍스트를 읽어내며 앞서 간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곳. 개개인이 자유롭게 이어질 수 있는 곳. 공부의 동료가 서로 될 수 있는 곳. 일리히가 오늘날의 블로그나 트위터를 보고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제목이 학교 없는 사회이다. 설사 일리히의 주장에 공감하더라도 그게 가능해?라는 소리가 나올것이다.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만큼 오늘날 사회에서 학교라는 존재는 당연하다. 이 존재의 당연함이, 이 학교라는 시스템에 대한 의문 없음이 바로 일리히가 지적하는 문제인 것이다.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은 당연하게 수용한다. 일리히의 이 책은 1970년에 씌여진 것이다. 지금 당장 학교를 없애자고 주장했더라도 이걸 계속해서 읽는, 번역하는,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인 사촌동생과 세계사공부를 하면서 내가 해준 얘기가 있다. "14세기에 살던 사람들에게 교회는 어땠을까. 유럽에 가면 모든 마을의 중심에 교회가 있는데 이사람들에게 교회는 비단 종교의 문제뿐만 아니라 법이었고 왕이었고 천국에 가는 수단이었고 학교였고 삶의 터전이었던 그야말로 생활의 전부였을 것이다. 당시에 교회없는 사회를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을까 사람들이? 서쪽으로 계속가면 낭떠러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눈에 보이는 대로 태양이 주위를 돈다고 배웠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지구는 둥글며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의 은총을 받는 다는 주장이 얼마나 새로웠을까 그만큼 르네상스는 혁명적인 변화였고 상상을 넘어선 변화였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수십 수백년이 지났을때 얼마나 당연하게 남아있을까. 그런생각을 하면서 세계사든 한국사든 본다면 역사책의 한줄 한줄이 결코 예사롭지 않게 엄청난 변화로 다가 올거야.

반갑게도 일리히는 오늘날의 학교를 중세의 교회에 비교했다. 하느님이 아닌 교회가 구원의 길이 되버린 제도말이다.  그당시의 사람들이 교회 없는 사회를 꿈꾸기 힘들 것이었다고 나는 감히 상상한다. 12세기, 13세기 교회없는 사회를 제시했다면 비현실적인 주장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종교재판에 쳐해졌겠지만 말이다. 나는 학교없는 사회가 현대사회의 시급한(다음 선거의 정책이 될만한) 현실적인 주장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변화라는 것의 단위가 수초부터 수백년까지 이르듯이 오늘날의 학교체제가, 학교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패러다임은 변해 왔다. 학교라는 사회체제에 담겨있는 패러다임에 주목한 일리히를, 아니 일리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렇게 읽는 독자들에게 비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비판한다면 적절치 않을 것이다. 

한국의 교육제도의 개혁을 논한다면 이범이나 이성호같은 자들의 책과 글을 읽어보는게 나으리라. 하지만 학교라는 제도에 대하여 근본적인 성찰을 해보길 원한다면 이 책을 한번쯤 읽어봤으면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나키즘에 대해서 좀 흥미를 갖게 됐다. 아나키즘이라면 단순히 무정부주의자라는 대답에 익숙했던 나의 무지가 이제는 조금 부끄럽다. 해설에 아나키즘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이 나오는데 한줄 한줄 읽으면서 나에게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이, 적어도 머리로는 강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하나는 이반일리히가 농촌 공동체보다는 도시에 조금 더 호감을 갖는 듯한 서술을 해 놓은게 흥미로웠다. 물론 농촌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 혹은 노마드적인 생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해놓은 부분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한국에서의 이반일리히 독자들은 대부분 녹색평론쪽의 사람이거나 교육계 사람일거란 생각과 맞물려서 흥미로운 점이다.

프로메테우스가 흔히 인간의 진보를 상징하는 용도로 많이 쓰이는데 그 후에 결국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벌을 받는 것은 그에 따른 필연이라는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에피메테우스적인간이 되어보는 건 어떠한가?

작년에 내가 농담처럼 나는 진보주의자나 좌파가 아니라 예수근본주의자이고 기독교정신보수주의자라는 말로 나를 칭했는데 일리히가 그런 사람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반가웠다. 에리히프롬은 그를 radical humanist라고 표현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과 무력함과 비폭력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것들은 복음의 가장 자비로운 요소들이므로 아주 쉽게 타락한 자나 조롱받는 자 또는 무시 받는 자들에게도 존재한다. ---기독교 복음은 또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치수단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일리히는 같은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던 폴라니를 사상의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독서를 하다보면 묘하게 내가 가야 할 길이 딱딱 열리는데 이제야 말로 폴라니를 읽어야 할 때가 왔다는 반가움이 들었다.


"모든 교육자는 권위주의자이다."


 

덧글

  • 지소낭자 2010/07/02 18:04 # 답글

    학교라는 것이 당연하다, 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 당위성을 부정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 정확히는 내가 말하는 건 학교라기보다는 공교육이지만.

    공부는 스스로의 참여에 의해 하는 것이라는 데에는 일단 동의. 그렇지만 나는 그 '참여'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교육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입장이야. 내가 생각하는 공교육의 역할은 한 명의 생물학적인 homo sapiens sapiens를 한 명의 사회화된 인간으로 만드는 것, 이기 때문에.
    물론 학교 이외의 곳에서도 저런 과정은 가능하겠지만 학교는 그를 위한 가장 effecient한 시스템이 아닐까 싶다.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그래도 최악은 피한 것, 이라는 거지.

    현대의 교육 문제점은 그 목적과 수단이 혼동된 것에서 왔다고 생각해. 사람은 공부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닌데 요즘의 시스템은 공부하기 위해서, 정확히는 좋은 성적과 학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으니까.
  • 지소낭자 2010/07/02 18:07 # 답글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바는 아니지만, 저 책은 한번 읽어보고 싶네.
    이번에 시간되면 한번 보자. 그 때 빌려줘...ㅋ


    덧. 무종교인의 입장에서 예수근본주의자, 라는 말은 일단은 좀 걸리네. 내 입장에서 종교의 근본은 사람의 믿음, 이라는 것인데 이건 어찌 보면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 될 수 있거든. 진리는 믿어야 하지만 믿는다고 해서 진리인 것은 아니니까. 뭐, 이건 다음에 보고 이야기하자. 잘 지내길!
  • 2010/07/03 00:5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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