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인 선택, 극단적인 제도. by 젊은노인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친구가 묻는다. 그거 하면 감옥가나. 그렇다고 답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거 너무 극단적인거 아닌가. 감옥까지 가야 하나.

감옥에 가는 것은 극단적인가. 그렇다고 하자.

보통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울일때 그 선택이, 혹은 결과가 나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극심한 피해를 주거나 가족 친지 친구들의 완강한 반대가 전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온전히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서 옳고 그른지, 선택을 할 경우에 그 결과는 어떠할지 고민한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의 기준보다는 주변사람들의 반응과 피해를 강하게 의식해야 한다면 어떠할까.

병역거부를 하면 친척들과의 관계가 다 끊어질 것이라고 우리 부모님은 말한다. 부모로서의 어떠한 지원도 해줄 수 없다고 또 말한다. 물론 내가 부모의 어떤 지원을 바라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슬프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몇몇 친구들은(아마도 꽤 많이) 내가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떠날 것이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날 비난할 것이다. 그것들은 꽤나 슬픈일이다.

나는 여전히 병역거부를 고민중이다. 군대를 가든 가지 않든 어떤 식으로는 나의 신념에, 나의 양심에 스스로 납득한 채 나의 행동을 정하고 싶다. 가야하니까 가거나 그저 반대하기 위해서 안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양심이란 놈은 복잡한 놈이어서 어디 속시원히 규정돼있지 않다. 끊임없이 회의하며 변하며 새롭게 규정해나간다. 가장 크게는 나의 병역에 대한 태도에 대한 나 스스로의 납득, 그것이 나의 고민의 가장 중차대한 문제일 것이다.

두번째는 내 인생에 있어서 병역에 대한 선택의 대차대조표이다. 단순이 편한 삶이냐 편치 않는 삶이냐하는 대차대조표는 아닐 것이다. 내 인생으로 인해서 단 한사람이라도 사람에 의해 합법적으로 죽여지는 사람을 막고 싶다는 내 신념에 부합하는 삶을 얼마나 살아 낼 수 있느냐는 대차대조표이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대차대조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병역을 거부했을 때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조목조목 따지고 비교해봐야한다. 시간이 흐른 후 내가 후회한다면 억울해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돌아봤을때 그렇다 좋은 결정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적어도 난 그 선택에 최선을 다했으며 삶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기에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양심에 대한 고민과 인생에 대한 대차대조표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 덧붙여 왜 나의 가족들이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왜 날 아꼈던 친척들이 나와 내 부모를 떠나야 하는지, 왜 내 친구들이 날 떠나게 될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해야한다. 이것은 30세도 안되는 청년에게 강요되는 선택이다. 온전히 양심의 소리에 조용히 귀기울이기에도 사실 벅찬 일인데 감옥이라는 사회적 굴레로 선택을 강요당한다. 가혹하다.

감옥을 가는 것이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감옥을 가겠다는 선택, 즉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제도는 어떠한가. 어떤 선택을 하면 감옥에 보내겠다는 제도는 극단적이지 않은가? 극단적인 제도하에서 나는 당연하게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내몰리는 것이 아닌가.

부모를 기쁘게 하면서 나 스스로를 실망시키지 않는 지혜로운 선택이란 과연 존재하지 않는 해답인가. 해가 없는 방정식을 오늘도 난 풀어보겠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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