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줄이는 방법. by 젊은노인

이계삼 선생님의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 중 전쟁, 일상, 세상의 슬픔이라는 글을 읽다가.

그는 슬픔의 근원을 묻는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그로부터 일어나는 슬픔의 근원을 묻는다. 그 답은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부시 2세인가? 글쓴이는 그를 전형적인 악인으로 묘사하지만 그가 이 세상 온갖 종류의 슬픔의 근원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상징일뿐. 상징이 사라져도 상징이 기대고 있는 원관념, 세계의 야만과 폭력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글쓴이는 아마도 우리 모두가 저마다 조금씩은 갖고 있는 야만성과 폭력이 슬픔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글쓴이가 인용한 글을 다시 옮긴다.

 
나는 고속도로로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이 바그다드를 향해 폭격을 하는 전투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권정생, <<녹색평론>>


 파병을 멈추려면 승용차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달아나야 한다. 30평짜리 아파트에서 달아나 이전에 우리가 버려두고 떠나왔던 시골로 다시 돌아가서 15평짜리 작은 집을 짓고 살아야 한다. 가까운 데는 걸어다니고 먼 곳에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살아야 한다... 지금 내가 타고 가는 승용차 기름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르크 사람들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고 느끼낟면 평화의 길은 멀지 않을 것이다.

권정생, <<작은책>>


이계삼,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 p.152에서 재인용.


부모님이, 친척들이 나에게 왜 이 나이까지 운전면허증이 없느냐고 물으면 "저는 자가용을 끌지 않으려고요"라고 답한다. 가끔 부모님과 민감한 대화를 하다보면 "너는 운전을 안하면서 왜 남이 운전하는 타고 다니냐"는 비난을 듣는다. 나도 안다. 나도 부끄럽고 고민되는 지점이다. "전기를 아껴쓰려고 하는 사람에게 아예 전기를 쓰지말라고 비난하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나도 적게 타려고 노력하지만 아예 안타지는 못한다. 나도 아예 안타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라고 대꾸하긴 하지만 내 속에 불편함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 기름을 먹는 자동차를 아예 안타고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다른 많은 소중한 것들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나는 슬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글쓴이도 말하듯이 "어쩔 수 없다"라는 말, 이것이 이 세상을 이끌어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으므로 모든것을 어쩌지 말아선 안되지 않을까. 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될 수 있는 한 줄여가는 것이, 즉 모두가 원하지 않지만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머리를 맞대어, 손을 마주잡고 함께 극복해나가는 것이 굳이 이름붙이자면 '진보'라는 것이 아닐까. 나는 개인적으로도 그 '어쩔 수 없음'을 줄여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진보'이다. 진보는 나에게 곧 줄임이다.

글쓴이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진실로 두려운 것은 이 '어쩔 수 없음'의 슬픔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캐묻지 못하는 것이며 그것은 상상력의 결여로부터 비롯된다. 글에서 등장하는 이라크 전쟁의, 아니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공포와 긴장에 대한 가해자가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상상력을 일상에서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관점을 넓혀야 하며 여러 논리적인 퍼즐을 맞춰야 하며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하기도 하다. 이러한 '난해한' 문제를 극복한다해도 그 마주함이 주는 불편함을 이겨내고 일상적으로 그 상상력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하려는 사람이 매일 아침 체중계를 확인하며 자신의 현재 무게라는 불편한 진실을 수치화해서 스스로 새기듯이 이 불편한 상상력을 놓지말고 일상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이라크전쟁이나 아프간전쟁이 몇몇 테러분자들에 대한 정의의 수행이 아닌 석유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우리들의 자가용이, 아파트가, 우리 삶에 있는 석유를 소비하는 많은 것들이 이러한 잔인함과 어느 지점에서인가는 닿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극복해내면 보다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매 시간, 매 분, 매 초, 매 호흡마다 새기지는 못할지라도 가끔씩은, 그것보다는 조금은 자주 불편함을 느끼며, 두려움을 느끼며 나뿐만이 아닌 우리와 닿아있는 많은 사람들을 함께 생각해가며 내가 소비해가는 것들을 요모조모 비교해가며 따져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줄여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가능한 상상력을 모아서, 머리를 맞대고, 손을 마주잡고 함께 말이다.

세살배기인 자신의 아들이 배고프다고 징징댈 때 밥을 떠넣어주면 볼이 미어져라 삼키는 것을 바라보며 부모로써의 충만한 기쁨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아기들을 굶겨야 하는 세상 많은 부모들의 슬픔을 떠올린다는 글쓴이의 태도는 참 감명깊다. 우리 모두가 세상의 슬픔을 조금씩 더 떠올린다면, 상상한다면, 세상의 슬픔이 조금씩 줄어들지 않을까. 슬픔의 근원을 묻는 불편한 상상력을 부여잡고 일상에서 마주하자.

읽은 글은 단행본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 p.140-156에 수록돼있으며 <<녹색평론>> 2005년 1-2월 호에 실렸던 글이다.

<<녹색평론>>은 나에게 있어 세상의 슬픔을 떠 올리게 하며, 그 슬픔의 원인과 구조를 조금씩 이해 할 수 있게 해주는 잡지이다. 그래서 방구석에 혼자 앉아 있을지라도 내가 세상과 닿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그 슬픔을 줄이기 위해 무언가를 개인적으로,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해준다. 고마운 잡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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