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by 젊은노인

끝없는 편견의 껍질까기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장애학 책에 대한
현민씨의 글을 공들여 읽다가 많은 생각을 했다. 또하나의 껍질이랄까.

다음은 핸드폰에 적어둔 메모

모든 동물들에겐 '장애'가 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어긋나는 형태를 장애라 부른다. 예를 들어서 발가락이 다섯개인 것을 '정상'이라 규정하면 발가락이 네개인 것은 '비정상'이며 '장애'라 한다. ;장애'가 없는 동식물은 내가 아는 한 없다. 모든 생물체에서 나타난다. 진화론에 따르면 '비정상'이 없으면 개체변이도 없을 것이다. '생물학'은 애초에 '비정상'을 전제한다.

내가 현민씨 글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현민씨가 소개한 장애학의 두 책을 읽지 않은채로 내가 받은 느낌은 '장애'는 결국 규정짓기에 의한 권력에서의 소외다. 한 종 내에서 절대다수의 개체가 다리가 있고 절대 소수의 개체만 다리가 없다고 해서 한쪽을 '정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수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덮어놓고 이는 피부색이 하얗지 않다고 해서 '비정상'으로 규정한 자들과 어떤면에서 다른가. 물론 '장애'에는 불편이 있고 기능적인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차피 정상인 사람들에 의하여, 또 정상인 사람들을 위하여 짜여진 물적, 정신적 양식에서 겪는 불편은 보다 근본적인 소외로부터이기에 예정된 결과다. 또한 기능적인 것만을 우리가 실제적인것으로 본다면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정신적 성의 괴리를 우리는 설명할 수 없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기능적으로는 '정상'적인 남자/여자이지만 정신/사회적으로는 여자/남자의 소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아니 예전부터 존재했고 이제서야 부분적으로 그들을 '정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겠다) 단지 추하게 생겼다고 해서(추의 기준은 유동적인것이며 문화적일 수도 있고 생물학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 우뚝한 코, 풍만한 가슴, 도드라진 엉덩이등은 모두 번식과 관계된 외적 형질라고 볼수도 있으니까) 그것을 장애로 구분하는 사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사회가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장애는 결국 외적이냐 내적이냐, 불편하냐 불편하지 않느냐로 보기보다는 규정짓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애는 또하나의 폭력이다. 단지 그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혹은 차별한다는 것에서 볼 수 있는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폭력보다도 오히려 그 깊숙히 그들이 '장애'를 갖고 있다고 규정하는 것부터가 폭력적이지 않은가.

여자가 지능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단 그 '지능'은 서구의 남자들에 의해 재단된 기준이다. 당연하게도 (모두는 아니지만 경향적으로) 여성이 지능이 떨어지는 것과 흑인이 지능이 떨어지는 것은 옳지 않더라도 맞는 말일 것이다. 나 또한 그렇고 사람들은 여성이 어떤 부분에서 리더의 역할이 부족하다,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어떤 측면에선 타당하다. 우리 사회는 이미 남성 위주로 짜여져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여성이 사회에서, 흑인이 사회에서 겪는 불편은 우리는 또한 '장애'로 규정져야 하는가. 여성이 감성적인 주체라면 우리는 그것에 동의할 지언정 그것이 '비정상'이라고, 개선해야 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성이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해 짜여진 권력구조에 남성성을 갖추고 개입하든지 불편을 겪든지 그것은 하나의 공고한 벽이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장애'적 현상이라고 볼텐데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이 '장애'의 규정을 공고히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가. 혹자는 법률이나 정치 자체를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렴풋한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가장 직접적으로 또 절실히 느끼는 것들은 장치로서의 군사주의 즉, 군대와 또 전쟁이 있을 것이다. 특히나 한국사회에서 그 벽은 높다. 또 이념적 도구, 혹은 결과물로서의 남성주의, 마초주의가 있을것이다. 복잡한 설명은 나중에 또 끄적거릴 기회가 있겠지.

어찌 됐는 난 오늘 장애에서 또 군사주의와 연관점을 나름대로는 발견했다. 장애를 규정짓는 것 자체에 주목하게 된 것은 나 스스롱의 또하나의 편견의 벽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에 가서, 렌즈를 거래하기로 한 사람을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되었고 나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사진찍는 사람은 티가 나기 때문에 멀리서부터 난 사람들을 쭉 훑었다. 발견하지 못하고 내 시선은 어느덧 내 주변까지 왔다. 내 가까운 곳에 어떤 사람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매고 있는 카메라 가방이 보였다.
아뿔싸, 그는 장애인이었다. 겉으로 확연하게 표가나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그를 보고 1초만에 알 수 있는, 아니 채 보기도 전에 어렴풋이 느끼고 스스로들의 규정을 짓고 지나갈정도의 심한 장애를 갖고 있었다. 장애에 대해서 스스로의 편견을 깨자고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30여분을 달려온 내 앞에 막상 그가 서있었고,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놀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니 놀란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조바심치며 노력했다. 그가 카메라를 꺼내고 렌즈를 교환하는데 도와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도와주는게 무언가 티를 내는것이 아닐까 고민하면서 스스로의 평정을 위해 노력하면서 내가 평소에 '정상'적인 사람들과 렌즈거래 할때도 렌즈정도는 들어줬다는 것을 생각하며 렌즈를 들어줬다. 렌즈를 거래하는 짧은 순간동안 나는 매 초마다 내가 이사람을 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티내지는 않을지, 웃으면서 카메라 칭찬도 하고 그의 부정확한 발음을 되묻지 않으려 수능 영어듣기할때보다 더 집중해서 들었으며 그가 건내준 돈을 세보지도 않았고 태연한척 사진을 찍어보라고도 하고(그의 손은, 아니 몸 전체는 상당히 흔들렸으며 그래서 어두운 곳에서 그 렌즈가 흔들릴까봐 조바심 쳤다) 계속해서 지금 사진이 흔들리는 것은 렌즈가 어두워서라고 암암리에  강조했고 너무나 태연하게 행동하려 노력하면서 난 그와 헤어졌다.

뒤돌아서서 생각했다. 내가 왜 그리 태연한 듯 하려고 노력했을까. 규정짓지 않으려고? 뭐하는 짓일까. 나는 애써 그가 나와 다르지 않다고 강조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내면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만큼 내가 그에게서 '장애'적인 요소를 극명하게 느꼈고 내 안에서 이미 심각하게 규정됐기 때문이 아닐까? 배려라는 것 자체가 규정이 될 수 있고 앞에서의 나의 논지에 따르면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머리 깨지는 고민을 난 했고, 생각과 행동, 또 생각과 반사적 태도에서 심각한 괴리감을 느끼면서 지하철 역을 나왔다. 찬바람에 머리가 한번 더 깨졌다.


편견이란 것을 많이 발견한다. 아마도 내 내면에 대한 관찰을 많이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라 다독인다. 편견들을 깨나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깨나가려는 노력자체도 편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양파의 껍질을 까면 그 안에 있던게 껍질이 된다. 까도 까도 나오는게 양파 껍질이랬나. 어쨌든 양파의 크기는 줄어들고 있다는데 작은 위안을 삼아야 할까. 이러다가는 양파가 남아나지 않는다. 종국에 남는 나는 무엇인가. 인생이라는 양파에, 나의 마음이라는 양파에 진정한 속은 있는가. 생각의 끝이 있다면 양파의 속도 있겠다.

덧글

  • 모모코 2009/12/16 09:55 # 삭제 답글

    최근에 장애인 영어표기를 'handicapped'이나 'disabled'가 아닌 'differently abled'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듣다가 '눈 가리고 아웅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좀 울컥했던 탓도 있지만, able 자체에 대해 내려진 정의와 기준이 달라지지 않는데 명칭만 바꿔놓고 뭐 하자는 건가 싶었습니다. '무슨 different able?' 이라고 대들고 싶은 심정이었달까. able 자체를 '비장애인을 위한 비장애인의' 능력으로 규정해놓은 게 대부분인데, 이따금 장애인이 보여준 '발상의 전환'이나 '다른 시각'을 끄집어내 진열해놓고 '그들의 different한 able!' 하고 쑈 하는 경우도 있고요....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정말 막막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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