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인간, 그리고 전쟁 - 칼폴라니<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by 젊은노인

경제와 인간, 그리고 전쟁

홍기빈과 함께한 평화주의자들의 행복한 책읽기,
칼폴라니의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거대한 전환>1장 백년평화


평화주의자들의 행복한 책 읽기 자리에서 홍기빈 선생님은 제 3차대전의 가능성을 언급하셨다. 2시간여에 걸친, 토론이라기보다는 강연에 가까운 얘기를 온전히 옮기는 것은 힘들겠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현재 시장경제 위기에서 각국이 국익을 노골적으로 도모하고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블록(block)화가 되고 그런 거대의 각축 속에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특히나 유럽과 미국 중국이 거대한 블록의 축이되고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대만과 한국같은 애매한 국가들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겠다고 얘기하셨다. 어쩌다가 '평화'주의자들의 ‘행복’한 책읽기에서 제 3차대전이라는 결론이 나왔을까. 인간과 시장자본주의, 그리고 시장자본주의와 전쟁에 그 연결 고리가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을 때 평화와 연관지어서 읽지는 않았었다. 시장자본주의가 인간을 경제적인 인간,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전제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모순들, 또 사회전체를 오로지 시장체제 하나로 이해함으로서 발생하는 사회와 경제의 이중적인 행보, 그로부터의 모순적인 대항운동들, 그리고 파시즘을 비롯한 대항운동의 좋지 않은 예들을 축으로 이 책을 읽어냈다. 즉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모델이 그 부실을 드러내고 있는 현실에서 사회적 기업이나 공정무역의 담론적 근거로 제시되며 대안 경제로 각광받고 있는 폴라니라는 사람에게서 마르크스의 케인즈의 하이에크의 것이 아닌 어떤 경제이론적 영감을 바랐던 것이다. 하여 사실 경제에 큰 흥미나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이 딱딱하고 어려웠던 것 같다. 또한 날 때부터 시장자본주의에 매몰된 내가 ‘시장자본주의’에 매몰되지 말라는 이 신선한  폴라니의 요청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책읽기 모임에서 홍기빈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한 후 큰 틀에서 관점의 전환이 있었다. 경제라는 것에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를 연관지어서 생각하게 되었고, 이론적 깃발보다는 실제적인 실천이 시급하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사실 웹자보를 만든 사람으로서 ‘시장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사회를 파괴하는가’라는 소개문구를 잘못 만들어 넣었구나 하는 책임이 느껴진다.)

거대한 전환의 1장인 백년평화는 역설적이게도 평화가 아닌 전쟁에 대한 얘기다. 이 ‘백년평화’라는 개념은 그 이전과 이후의 유럽의 역사에서 전쟁이 항시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전쟁을 극도의 혼란상태, 일시적 분쟁상태로 이해하지만 인류역사에서, 그리고 특히 유럽의 역사에서 전쟁은 분명 계속됐으며 오히려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적어도 지금시대에서 정상적인 정치인이 대대적인 전쟁을 일으키자고 ‘아직은’ 부르짖지는 못하지만 오랜 세월 전쟁은 계속돼왔고 여전히 일부의 정치인, 자본가, 그리고 일반적인 시민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전쟁의 필요성과 필연성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홍기빈 선생님이 화학의 동적평형개념을 빌어 설명한 세력균형체제에 있어 전쟁은 일종의 국가/체제간의 소통의 수준으로 여겨지기까지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쟁은 근대이전에는 일부 왕족/귀족/종교 등의 지배층에 한정된 특권이었으나 근대에 들어와 전쟁수행능력이 자본으로 넘어왔고 두 차례의 대전을 통해 이제 전쟁의 책임은 시장에 혹은 시장과 사회의 불협화음에서 비롯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전쟁과 혼란이 시장경제체제가 완전히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백년평화시기에 자본가들이 전쟁으로 인한 불안정과 손해를 피하기 위해 전쟁을 억지해왔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폴라니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주장은 허구이다. 자유주의자들의 허구적 전제와 달리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닌 총체적 존재이고 사회 또한 경제적 원리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 문화, 종교 등의 많은 동력에 의해 움직인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시장자본주의는 사회에 필연적인 모순을 가져온다. 이러한 모순은 물론 극복되어야 하지만 그 방법적인 측면에서 파시즘과 같은 위험한 것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 극단적 형태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계속해서 과도하게 생산하고 과도하게 소비해야 하는 시장 자본주의는 전쟁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익이 되지 않고 불안정해지기에 전쟁을 반대하는 자본가라면 큰 이익이 될 것이 확실하고 그 피해가 자신들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면 언제든지 전쟁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전쟁을 일으키는 세 가지 원인을 공포(정치적 이유), 영광(이데올로기적 이유), 그리고 이득(경제적 이유)에서 찾는다. 그리고 "부정적 영향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오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는” 개개인의 낙관주의가 결정적이라 했다. 자본주의시대로 오면서 국가에 의한 영광과 공포는 이득에 비해 그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득은 여전히, 아니 더 큰 동인이 될것이다. 이 이득은 자본가들의 이익일 수도 있고 국가의 이익일 수도 있고 다수 대중의 이익일 수도 있다. 자본가들의 이익을 침해하기 때문에 유럽에서 백년평화가 이루어졌다지만 충분히 이익이 예상된다면 언제든지 전쟁은 기획될 수 있다. 실제로 지금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분쟁들 또한 속을 들여다보면 미국의 거대 군수산업이나 자원개발,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깊게 개입되어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쟁기획이 비단 자본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때때로 전쟁을 원한다. 이득을 위해, 낙관주의에 의해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키자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를 종종 만들어낸다. 제1차, 2차 세계대전도 소수의 권력층만이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대중의 광범위한 사회적 열정이 동원된 전쟁이었다. 우리는 때론 민주주의가 전쟁에 대한 해결책이라 말하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의 극적인 형태인 고대 아테네에서도 민중은 전쟁을 원하곤 했었다.

우려스러운 것은 현재의 세계의 움직임도 비슷한 결을 갖고 흐른다는 것이다. 얼마전 독일에서는 네오나치의 집회가 있었다. 1200명이라는 크지 않은 숫자지만 이들이 공공연히 거리 집회를 갖기 시작한다는 것은 좋지 않은 파시즘적 분위기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극단적이고 노골적인 파시즘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세계권역에서는 경제위기를 틈타 민족과 국가의 경계와 증오를 다지고 서로의 이해관계를 따라 나라들이 뭉쳐가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는 이러한 전쟁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인류는 불과 30년 만에 더 치명적인 전쟁을 일으켰다. 폭우 때의 계곡의 급류처럼 전쟁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위협한다. 이러한 말은 결코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이 아니다. 요즘 부쩍 김수행(공황의 탈출구는 전쟁뿐인가, 경향, 10.27.), 박노자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 전쟁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는 것이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아프간 파병에 대한 얘기는 아주 작은 단편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아프간에서 전쟁을 지속하려고 하는 미국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는 역설의 시대다.

평화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저' 부르짖는 평화는 숭고하나 공허해질 수 있다. 전쟁은 도덕적 타락에 의해서, 혹은 민족적 영광을 위해서, 또 종교적 열정 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시장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와 사회의 불협화음을 메꾸려는 반대급부적인 이중운동의 가장 극단적 형태가 파시즘과 또 이어지는 전쟁이라는 것은 그 괴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극명한 지금 전쟁의 위험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거대자본에 의해, 그와 결탁한 국가와 종교와 더불어 대중들에 의한 전쟁에의 열망은 그 어느 것보다도 경제와 사회적 갈등으로부터 빚어진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따라서 전쟁이 없는, 즉 평화에 대한 열망은 그 사회경제적 갈등에 대한 이해와 해소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회와 경제의 불협화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고 평화로운 해소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개인적으로 평화를 외치고, 긴 호흡에서 또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도덕적 호소와 정치적 활동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경제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와 극복 또한 평화를 향한 실천에 적극적으로 요구된다. 다리 하나로 걸음을 옮길 수는 없다. 두개의 다리가 보조를 맞춰 걸음을 내딛을 때 비로소 우리는 걸을 수 있다. 이론과 실천, 책상과 현장, 머리와 가슴 등의 식상한, 그러나 중요한 화음들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의 모임을 통해서 또 하나, 평화에 대한 노력은 경제공부와 더불어져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덧붙이게 되었다.

진보주의자들 혹은 평화주의자들은 경제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경제자체가 시장적이고 자유주의적일 거라는 편견에서다. 사실은 폴라니의 책을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아, 내가 시장이란 것에 너무나 매몰됐구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경제살리기가 시대정신이라며 CEO식의 대통령을 추구하는 자가 대통령인 한국에서 우리가 과도하게 시장자본주의에 매몰 됐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또 그를 탈피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자체를 기피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우리는 극복대상에 대해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려워만 했던 경제공부에 힘쓰는 것도 평화주의자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폴라니는 어느 시스템 하나를 부르짖지 않는다. 그는 의외로 현실주의자이다. 시장에의 매몰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시장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국가의 문제를 우려하지만 국가의 권력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시장, 재분배, 호혜성이라는 세 가지 원리가 서로 균형을 이뤄 돌아갈 때, 또 경제뿐만 아닌 사회의 총체적 성격을 고려할 때 인간의 소외가 해결된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시장의 역할은 이미 강하다. 하지만 재분배와 호혜성의 측면은 너무 약하다. 이는 국가가 그 재분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큰 부분에서 시민사회의 책임이 크다.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시민공동체들이 제각기의 역할을 해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이에는 많은 시민들의 지적 고양이 필수적이다. 폴라니가 평생 동안 힘썼던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에 대해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최근의 유행인 공정무역이나 사회적 기업도 그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평화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번역해서 알리는 것 자체가 한국의 평화운동의 시급한 당면과제기에 그에 대한 노력도 필요하다.

폴라니에게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절대적으로 무엇이 옳을 수는 없고 무엇 하나만으로 모두 해결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그 중심에는 총체적 인간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경제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이 인간의 시급한 당면과제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쟁을 막는, 평화를 향한 적극적인 실천이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