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진리는 민주주의를 저지한다 - 잔니 바티모 by 다름과틀림

흥미로운 지식인을 봤다.
자세히 읽어보고 이해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서라도
신문에 소개된 내용중에 나의 눈길을 끄는 부분을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이 생겨 몇자 적는다

 

잔니 바티모는 193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해석학과 미학의 관점에서 종교와 사상의 문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로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탈근대적 사고로 연역하면서 해석학의 기초 위에 이른바 ‘약한 사고’의 이론을 주창했고, 이를 통해 대중문화와 인터넷이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좌파 정치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1964년부터 2008년까지 토리노대에서 철학과 미학을 가르쳤으며,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진실에 대한 예술의 주장>, <기독교 이후>, <허무주의와 해방>, <해석학적 공산주의> 같은 책들을 썼고, 국내에 <투명한 사회>와 <근대성의 종말>이 번역돼 있다.

 
» 잔니 바티모
# 바티모는 탈근대성을 다원주의로 파악한다. 다원주의는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할 때 발생한다. 반면 절대적인 진리는 민주주의를 저지한다. 절대 진리가 있고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절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을 반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와 이별하는 시대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한껏 높이는 시대다. 바티모에 의하면, 진리가 단단하고 영속적인 객관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존재론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진리를 재해석과 재맥락화, 재서술에 의해 새로 구성되는 어떤 것으로 선별하고 채택해야 하는 해석학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 철학은 세계를 묘사하기보다 해석해야 한다. 탈근대적 해체가 통일된 역사서술에 종말을 고한다면, 그를 위한 철학은 ‘차이의 모험’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존재를 사건으로 인식함으로써 진실의 개념에 해석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진실은 없고 해석만이 있으며, 따라서 진실의 가치는 해석들의 차이들에 따라 결정된다. 바로 여기서 해석하는 주체의 자리가 중요하게 떠오른다. 진실이나 존재는 주체의 해석 행위에 따라 가변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티칸과 같은 종교 기관이 의도적인 설교를 하고, 미국과 같은 정치적 제국이 자본주의를 선전하며, <엔비시>(NBC)나 <시엔엔>(CNN) 같은 텔레비전 네트워크가 선택된 뉴스를 통해 ‘객관적 사실’을 정의한다면, 철학은 진실이란 단지 해석들의 게임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 바티모는 1999년부터 5년 동안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인권과 문화, 교육, 매체와 같은 분야에서 활동했다. 바티모의 유럽의회 활동은 다원주의의 확립으로 두드러진다. 유럽연합 헌법에 ‘기독교적 가치’라는 용어를 삽입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을 때, 바티모는 유럽은 다원주의적이어야 하며, 단일 종교를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유럽의 기독교적 전통과 가치를 부정하고 망각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기독교적 가치는 세속주의와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속주의는 자신을 포기하는 방식의 사랑이라는 가장 기독교적인 개념에 토대를 둔다. 그런 면에서 세속주의는 다양한 종교들이 제한 없이 스스로의 신앙을 추구할 수 있는 다원주의와 통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교적’ 힘은 세속주의의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토대를 제공해준다. 유럽연합 헌법에 기독교 개념을 넣으려는 바티칸의 압력은 바티모의 눈에 유럽의 다원성을 좀먹는 교조적 형이상학의 발현과 다르지 않다. 종교는 세속주의로 나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종교성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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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모가 유럽에서 본 것은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시민주의)의 꿈이다. 유럽연합은 초국가적 국가가 점령이나 침공, 전쟁이 아닌,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의해 구성된 최초의 경우다. 바티모는 유럽연합을 진지한 정치적 진보의 표상으로 본다.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자연스러운 기반이 아니라 다양성들의 자발적인 기초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단 하나의 언어와 종교, 인종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와 종교, 인종에 의해 구성되었기에, 무한하게 뻗어나가고 적용될 수 있을 공동체라고 바티모는 굳게 믿는다.
 

# 바티모의 좌파적 사고와 정치 실천은 사회주의가 인류의 운명이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사회주의는 모든 사회적 가치와 권력의 민주화가 펼쳐지는 우리의 집단적 삶을 국가적으로 조절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는 ‘투명한’ 민주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투명한 민주 사회란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공통의 결속된 원칙들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열린 공간을 남기는 사회다. ‘불투명한’ 사회에서 폭력은 형이상학적 구조와 그것이 빚어내는 궁극적 진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반면, 진정한 인간 존엄성은 기존의 자연스러운 형이상학적인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비틀고 재고하는 개인들의 자유에서 나온다.


박상진/부산외대 교수


위의 구절들은 기사에서 맘에드는 부분들을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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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과 이틀전에 사람들 앞에서 세계시민주의를 어설피 역설했고, 또 그 사례로 유럽연합을 들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봐도 참 어설펐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잔니 바티모라는 사람을 알게되어서 참 반갑고 고마웠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속 시원하게 했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해서 궁금증이 더욱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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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로그의 제목이 다름과 틀림이듯이 나 또한 다양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진화적으로 보더라도 다양성은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은 자유경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토대에서 나올 수 있고 보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절대적 진리가 약해져야 한다는데에 너무나 공감한다.

+ 세계시민주의를 기반으로 사회주의가 인류의 운명이라는 이 학자의 생각은 세계시민주의와 함께 인류가 현재까지 갖고 있는 가장 이상적인 구성체제라는 나의 생각에 한 지표가 되어준다. 하지만 모든 사회적 가치와 권력의 민주화가 펼쳐지는 우리의 삶을 국가적으로 조절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걱정이 앞선다.

첫째는 모든 가치가 수동적으로(물론 민주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국가에 의해 수동적이다) 조절되는 사회가 인간적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수많은 욕구와 가치가 있다. 또 그것을 자유롭게 실현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고 그것이 억제되면 억압을 느낀다. 내가 이상으로 설정하는 사회주의는 인간의 경제적인, 물질적인 욕구를 사회적으로 조절하고 그 외의 가치들을 자유롭게 향유하는 사회이다. 물론 물질과 다른것을 떼어놓는 나의 생각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가치를 조절하고 통제한다면 억압의 축적이 사회를 붕괴시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조절주체의 문제이다. 소련,중국등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실패한것은 결국은 독재였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는 누군가가 그 시스템을 조절해야 하기때문에 권력의 집중이 생기기 쉽다고 생각한다. 이 집중된 권력은 역사적으로 볼때 거의 항상 부패하고 독점한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사회주의에서는 이러한 부패를 독점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즉 민주적인 사회주의, 투명한 사회주의를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다. 이러한 독점과 부패가 단지 역사적 경험이 아니라 필연적 속성일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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