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문제 고찰. by 다름과틀림

블로그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고 트랙백이란 것을 처음 써봤습니다.
김규항 선생님의 블로그를 열심히 보는 한 팬인데요
혹시 이 다듬어지지 않은 사실 주장이랄 것도 없는 글을 읽으신다면(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적은거라)
조언을 해주시면 좋겠네요.




김규항의 <예수전>을 굳이 읽지 않더라도 성경에는 사회주의적인 모습, 최소한 공동체주의적인 모습이 많이 나온다. 또한 교회에서 어릴 적부터 천국은 공산주의이다. ‘사람들이 서로 필요한 만큼만 먹고 서로가 서로를 먹여준다. 하지만 이 땅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듣는다.(인간의 이기심이 본성이라는 전제를 깐다면 천국에서는 이러한 이기심이 사라진 상태이다. 그렇다면 지옥이란 것은 그 반대급부로써 이타심 이라고는 남지 않는 증오와 투쟁의 공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사회는 사실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요소들만 몇 가지 꼽아보도록 하자.

 

-      출애굽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매일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린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음식들을 사람들이 아무리 비축해놓아도 다음날에는 여지없이 상하여 먹지 못하고 새로운 만나와 메추라기를 기다린다. , 잉여자원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부를 소유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먹게 된다. 일종의 배급 주의다.

 

-      오병이어의 기적. 현대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르면 능력 있는 강사인 예수님에게 청중이 가져다 준 보리떡과 물고기는 예수님께 속한 것이므로 혼자서 드시고 청중들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나누셨고, 사람들은 또 다시 필요한 만큼 먹었다. 물론 기도로 인해 물량 자체가 늘어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십시 일반 해서, 즉 서로서로 나눔으로써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초대 교회에서 사람들은 서로 물질을 공유하여 살았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예가 가장 극적인데 성경의 이런 모습은 노력한 만큼 벌어 자기의 소유로 두고 잉여 자원을 쌓아가는, 결과적으로 자원이 편중되는 모습을 보이는 자본주의보다는 공동체적으로 생산하여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모습이다.

 

 

현대 한국 교회는 철저하게 자본에 예속된 모습을 보인다. 선교, 전도 같은 사역과 신도관리, 교역자 생활, 교회 운영비들은 모두 돈으로 지속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 즉 자본이 모든 근간이 되는 자본주의시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돈이 꼭 안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름난 목사가 검은 돈을 받고, 고급차를 타고, 휘황찬란한 교회 장식과 더 높은 십자가를 위해 건물에 돈을 쏟아 붓는다. 비단 교역자들의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대다수 성도들의 욕망이 투영된 효과이다. 교회를 개척하면 무조건 성장해야 하고 그 신도들이 새롭게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든, 아니면 주변 다른 교회보다 이 교회가 좋아서든 신도수를 늘리는게 교회들의 지상 목표이다. 선교든 봉사든 교회의 사역들 또한 돈에 예속되어가고 규모의 경제로 경쟁한다. 따라서 보다 큰 교회가 사역경쟁에서 승리하고 사람들은 더욱더 화려하고 큰 규모의 교회로 간다. 기본적인 원리에 있어서는 대형 슈퍼 때문에 동네 구멍가게가 망하는 것이나 대형교회들 때문에 동네 작은 교회가 망하는 것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많은 교역자들은 서민들과 똑같이 샌들을 신고 걸어다니며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니신 예수님과 달리 번쩍거리는 검은 정장에 반듯하게 신사처럼 옷을 입는다. 신도들도 그러한 목사를 선호한다.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만 되도 목사님들은 교회에서 나오는 차를 타고 다닌다. 물론 봉고 같은 큰 차를 타고 다녀야 신도들을 태우고 다닐 수 있는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의 대형교회 목사님쯤 되고 나면 봉고는 검정 그랜져로 에쿠스로, 비엠더블유와 벤츠로 바뀐다. 목사가 안 그러려 해도 신도들이 그대로 냅두지 않는다. 목사는 신도들의 눈높이에 맞춰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속된말로, 자기 교회 목사님의 가오상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대형 교회 목사님들을 보면 얼굴에는 기름기가, 배에는 살이 넘친다. 필사적인 자기 관리가 아니면 몸매관리하기 어려운 것이다. 술도 안마시고 규칙적인 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며 한국의 모든 신도나 교역자들이 그렇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서울의 밤하늘을 저마다의 금자탑에 높게 세운 빨간 십자가가 뒤덮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미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다면 이것은 한국교회의 문제이고 한국의 환경의 문제라고 두고 나는 그냥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나갈 것인가? 물론 교회 또한 극도로 자본에 예속된 한국 사회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제국주의자들의 선교사와 결탁한 지주들부터 시작해 지금의 이 물신제일주의에는 한국 기독교의 책임이 존재한다. 현 정부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교역자들만 봐도 그렇다. 또한 적극적으로 주도하지는 않더라도 현실 세계의 낮은 자들을 외면하고 구조적으로 낮은 자들이 핍박 받는 사회로 변하는 것에 대한 방관자적 책임은 분명하다. 물론 교역자가 어떻게 사회 문제에 대해 간섭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그리고 분명 그런 영성의 사역자들도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나 있느냐?)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행동하시지 않았다. 낮은 자들에게로 향했던 예수님께서는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로라고 하셨다. 가이샤의 제도와 체제를 인정한다면 그에 대한 참여도 현실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장은 없다. 다만 모태신앙인으로서 또 현대사회를 고민 속에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아주 작은 부분만큼의 일말의 책임과 의무를 느낀다. 아마도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비전이 아닐까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고민을 단편적으로 한국교회의 현재의 단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좀더 고민하고 싶다. 물론 내가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한국의 교회는 부자를 우러르는가? 적어도 예수는 부자를 우러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놓고 비난했다.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대놓고 역차별적인 발언을 하셨다. 서울대, 삼성이 천국인 마냥 추앙 받는 한국사회에서 혹여 예수님이 대통령이 되셨다고 할때(되실리가 없다) 한국사회에서 부자가 서울대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 것보다 어렵게 하겠다라고 신년연설에서 말한다면 바로 탄핵될 것이다. 다음날 조중동의 일면이 안 봐도 뻔하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대놓고 부자를 핍박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재물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가 욕심을 버리거나 죄를 짓지 않기가 그만큼 더 어려우며 더욱 더 많이 노력하고, 낮아지고, 나눠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게다. 오늘날 한국은 어떤가? 대형교회에 가보면 교회의 장로님이라 하는 어른들은 우리사회의 부자들이 많다. 얼마전에 331억을 재단에 출연한 이명박 장로님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분은 과연 낮아지려고 노력하시는가? 내 기억으로는 두세번쯤 저잣거리에 나오신 것 같다. 그것도 진정성 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말이다. 내가 이명박 대통령을 정죄할 수는 없고, 또 한국의 모든 장로님 부자들이 일일이 천국에 가실지 못 가실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확실히 말 할 수 있는 것 하나는 한국땅에서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믿는자에게 복을 주신다 한다. 개인의 부 또한 노력하는 자들, 믿음이 좋은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이라 얘기한다. 기도 열심히 하는 집사님 아들이 서울대에 가는게 당연하고, 교회 사역 많이 하는 장로님 딸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도 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하나님은 재물로 복을 주셔서 사랑하는 자녀로 하여금 굳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게 만드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쨌든 그렇단다. 그렇다면 어째서일까?

 

서두가 길었다. 이제부터가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부분이고 궁금한 부분이고 보다 폭넓고 뿌리깊은공부를 위해서 꺼내는 부분이다. 그리고 함부로 말하기에는 참으로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이라 참으로 부끄럽다. 하지만 이렇게 꺼내놓고 아무도 안 읽는 나의 글을 내가 추후에 읽어보고 공부를 해나가지 않을까 한다. 일단 이런 문화의 근본은 어디일까? 돈이 최고의 지위이자 권력이고 존경의 대상이 되는 미국에서 온 풍조가 더욱 한국적으로 왜곡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미국에는 귀족개념이 없었고 따라서 어떤 가문의 전통이나 양식 보다는 그사람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행운이 존경의 기준이 된다. 빌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워렌 버핏등이 다 그렇다. 돈이 곧 권력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시작을 파고들어가면 칼뱅과 막스베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칼뱅은 근면과 청빈을 역설했다. 타락한 교회 내에서 매우 신선했고 개혁적인 주장이었고 이러한 청교도 정신은 급속히 확장되었다. 또한 막스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역설했다. 초기의 자본주의가 매우 혁명적인 이념이었듯이 이러한 근면하고 진취적이고 사상들은 타락해있던 기독교계를 뒤 흔들었고, 어떤 의미에서 깨워냈다. 이러한 정신이 근대 유럽과 특히 미국을 성장시킨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사상적 매너리즘일지, 아니면 처음부터 잘못된 이념이었을지, 과학의 발달로 종교의 상징과 신화가 무너짐으로 해서 그 도덕적 권위를 실추해서인지는 나는 잘 알 수 없지만 어느새 그러한 청빈함과 투명함은 사라지고 물질에 대한 무한한 욕망과 자본에 대한 예속만이 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덕과 권위는 땅에 추락하고 있어서 교황과 개신교는 날로 발전하는 과학에 어느 영역까지를 양보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현실 세계에서 한발자욱씩 뒤로 물러나고 있는 중이다. 교회가 부패하여 교회가 청렴을 주장하지 못하는 시대이다. 성장하고 있는 대형 교회, 특히 한국 교회들은 분명 그러한 물신주의와 자본주의와 성공적인 타협을 이끌어낸 결과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교회의 가치들을 자본주의 시대에서의 생존의 대가로 양보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으로 점철되는 자본주의는 더욱 더 교회적, 성경적 가치들의 설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주위를 보라,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여유가 있는가?


어떻게 보면 지금의 한국교회에 나타난 이러한 안좋은 모습들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칼뱅과 막스베버에 의해 왜곡된 신앙의 잘못된 표현이 아닐까하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왜곡 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또 결과로 나타났는가에 대한 공부를 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관심은 이런 방향으로 지속될 것이다.

-      내가 주장한 논거에 대하여 성경적 근거를 찾을 것

-      칼뱅주의에 대하여 공부 할 것

-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는다.

-      서구의 기독교와 자본주의, 그리고 과학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고찰한다.

-      한국교회 현상에 대해 더욱 관찰하고 성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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