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욱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090712 by 다름과틀림

신앙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나의 생각.

 아름다운 산호섬을 이루고 있는 산호를 보라고 전병욱 목사님은 말하셨다. "산호 하나하나는 그들이 모임으로 해서 어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그들의 생존을 위해 숨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산호들이 수없이 모여 아름다운 산호섬을 만든다. 그것이 섭리이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맞는 말이다. 산호뿐만 아니라 저 하늘을 나는 새도, 저 들의 사슴도 그들 각자의 생존을 위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하지만 사람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각, 혹은 이성이란 것을 주셨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한다. 인간은 그것이 본능이든, 사회화의 결과이든 숙명적으로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라 사회(집단)을 고려한다. 자기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행동은 할 지언정, 그의 의식 속에는 관계가 고려된다. 동물에게도 이런 것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사람의 사회적인 사고 또한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할수도 있다. 이성이란 것과 감성이란 것, 그리고 본능이란 것의 깊은 본질을 향하여 들어갈 수록 그 경계는 희미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에서는, 성경에서는 분명 사람은 동물과 다르다고 전제를 한다. 영혼, 이성, 사회화, 그 어떤 말로 구분지을 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동물과 같다면 사실 목사라는 정신적 직업은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요셉을 말하신다. 요셉이 처한 환경은 모두 부당했다고. 형들에 의해 팔리고, 탈출하지 않고 끌려가고, 억울한 누명에도 그 어떤이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 하나하나의 과정은 모두 부당하며, 정의란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전체의 흐름과 결과가 하나의 선을 이뤄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다. 섭리인 것이다.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때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고 우리의 좁은 시야와  식견을 근거로 바보가 되지 않는가?

 

 맞는말이다. 우리는 모든 순간 순간에 우리가 처한 환경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는 때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고 엄청나게 약한 인간이면서 위대한 척 한다. 소위 지식인이라 하는 자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그러한 오류를 더 많이 저지르는 것을 많이 목격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알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우리는 철저하게 나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사고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나약하게 만드신 한낱 존재인 나는 고민한다.

 

 

 궁금하다. 요셉의 삶으로부터 아주 먼 훗날인 지금,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몇 개의 구절을 통해 요셉의 삶을 볼 때 그의 삶의 순간들이 참으로 부당했지만 결과적으로 섭리를 이루었다고 우리는 감탄한다. 하지만 요셉의 삶에서 그는 고민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하루, 24시간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끊임없는 고민을 하고 선택을 한다. 훌륭한 위인들의 연표를 볼 때 물론 결과적으로 봤을때는 그들은 고민하지 않고 하나의 목적을 향해 일련의 선택들을 하며 움직인것으로 보일때가 많다. 하지만 그 연표 한줄 한줄에 그들의 치열한 고민과 갈등이 담겨 있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셉도 물론 그러했을것이다.

 

 요셉은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의 꿈을 단순히 자다가 꾸는 생리적인 현상으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에게는 목적이 있었고 이상이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이상을 갖고 태어나 평생 그 이상을 실천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생각과 고민과 갈등속에 삶속에서 이상이 생기고 신념과 의지로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 요셉의 순종은 단순한 인정이나 그저 파도를 넘는 반사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의 어린시절 형들이 괴롭힐 때 그 초원에서 요셉은 수없는 괴로움과 갈등이 있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는 그 행간에 그의 고뇌와 고통이 느껴진다.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그는 기뻤을까? 기쁘다면 순종의 의의도 없다. 억울함을 감내하는 그 순종이 그의 신념인것이고 믿음인 것이다. 그의 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났고 그러한 고민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었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고민한다. 그러한 나를 전병욱 목사는 때린다. 고민만 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교만하고 자꾸 더 알려고 든다고. 그래서 나는 괴롭다. 내가 나의 부족함을 느끼기에 더욱 알려고 하고 더욱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고민이 갈등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주셨음을 믿는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날 산호나 사슴으로 만들지 않고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하나님을 닮은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이유라 믿는다.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의 몸만으로 섭리를 드러내려고 한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방법과 인간의 머리를 통해 예수님은 역사하셨다. 소년시절을 보냈고, 광야에서 고뇌했고 시험들었으며 대중에게 말씀하시고 비판받아야 하는 자들을 비판했다. 예수님이라고 모든일에 사랑하고 순종하지 않았다. 부자들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이방인이나 여자와 어린이를 배척하는 마음이 어두운 모든 자들에 대하여 해야 할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속에는 이러한 비판정신도 살아있어야 할 것이다.

 

 위험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극단적인 적용이긴 하지만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나의 영향력이나 관계가 무시 할만큼 작거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그 판단을 포기 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은 그저 철저하게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기에 나는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산호가 자신의 숨을 쉬듯이 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본다면 어떠할까? 일제 강점시대에 수많은 목사들은 순교하였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신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민족적인 또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뜻이라고 생각해버린다면 우리는 아주 쉽게 친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부당하게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사회정의라고 하는 것이 모두 타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조건 부정하는 것만이 옳은 태도는 아닐 것이다. 그 사회란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구성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을 닮은 우리의 일반 의지가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반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 하더라도, 또 하나님을 믿는 수많은 각기다른 사람들이 공감하는 어떤 가치(단 하나가 아닐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한 표현일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전병욱 목사님의 말씀대로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모든것을 다 알 수없지만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교회를 나오면서 심한 배앓이를 했다. 무얼 잘못먹은 건지. 상한 음식을 먹은 것은 아닌지. 먹은것에 대하여 되씹었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멜라민, 유전자 조작, 광우병 소고기등 엄청나게 많은 위험한 식품들에 노출돼있다. 우리가 아무리 유기농에 국산에 웰빙만을 먹어도 그런 음식들에도 다 나쁜 성분은 들어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보면 사실 좋은 것을 먹으려는 노력이 부질 없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한 음식, 썩은 음식은 먹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독이 들어있는 것은 먹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인간으로써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 먹으려거든 자신에게 맞는 것을 먹어야 할 것이다. 젊은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전병욱 목사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설교말씀중에 제국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이 조금은 탐탁치 않닸다. 물론 제국은 다양한 민족이나 문화가 어울려 사는 것을 결과적으로 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국이 다른 통치제도와 구별되는 점은 통치의 확장성에 있다. 그것이 어떤 공존이나 화합이 아닌 나의 통치를 다른 문화/민족에게 확장하려고 하는 욕심이 제국의 근본정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제국주의라는 말을 침략의 야욕이나 군사적 패권의 함축을 담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전병욱 목사님은 말씀 하신다. 대한민국은 단일 문화/민족이기에 절대 제국이 될 수 없다고. 두가지 측면에서 잘못된 생각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나라는 이미 제국을 칭했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칭했다. 그것은 그당시의 조선이 많은 민족과 문화가 어울려 살기 때문은 아니었다. 세계적 흐름일 수도 있고 자신의 권력욕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세계적인 제국주의의 흐름에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 제국도 군사적으로 부강해지고 문화적으로 강력해지면 다른 나라/민족/문화로 통치를 확장할 수 있다는 전제를 담았다고 말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패했다. 물론 우리가 제국이 되지 않아도 식민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제국을 선포한 이상 통치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에 더불어 다른 나라로부터 통치가 확장되어 들어올 수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현재 한국에는 하나의 민족만 사는 것이 아니다. 중국, 일본, 몽골등의 수많은 역사적 교류를 굳이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근대시대에 들어와서 우리가 편의상 구분하는 민족개념으로 봐도 우리 나라엔 하나의 민족만이 살고 있지 않다. 동남아로부터, 동유럽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로, 난민으로 더불어 살고 있다. 물론 주류가 아니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 있는가? 엄연히 이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일반적인 인식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또 그것에 진심을 담아 외치고 있는지는 잘 알수 없지만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정부와 언론에서 다문화 사회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시점이다. 전병욱 목사님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저 도와줘야할 동정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해서 걱정이 된다. 진심이 아니라고 믿지만 무의식 중에라도 단일민족’, ‘단일문화’, ‘단일역사라는 경계짓는 용어에 대해 사용을 신중히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를 할 수 없기에 겸손해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은 여전히 나에게 유효하다.  교만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하는것도 말이다. 하지만 내가 오만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것을 극복하려는 생각 또한 교만일 수도 있다. 내가 부족하다고, 나는 무지하다고 입으로 드러내는 것 또한 나의 교만이며 나의 부족이요 무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나를 되돌하보며 성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완벽할 수 없기에 '믿음'이란 것이 존재가치를 가진다.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있다면 굳이 믿을 필요도 없다. 그냥 알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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