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근칼럼]적의가 불안의 근원이다. by 다름과틀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6241819555&code=990339

[이대근칼럼]적의가 불안의 근원이다.

보수는 자신의 강점을 안보로 꼽는다. 일반적으로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과연 그런 인식은 타당한가. 마침 한반도가 불안하다. 이명박 정부의 불안 대처 능력을 평가함으로써 그런 세간의 인식이 맞는지 검증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다. 먼저 한·미정상회담을 보자. 회담은 이명박의 주도로 북한을 뺀 5자가 모여 북한을 압박하거나 강력한 제재를 하거나, 핵우산을 명문화한다는, 한마디로 대북 압력을 강화하는 것들이다. 북한은 “제재에는 보복으로, 핵무기에는 핵무기로 대답하는 것이 우리의 본때”라고 맞섰다. 정상회담으로 한반도가 더 안전해졌다기보다는 불안해졌다. ‘조선신보’는 “조선의 핵억제력 강화 노선의 정당성이 입증되었다”며 핵우산에 위축되기는커녕 고무되었다. 결국 이 회담으로 남북 모두는 자기가 핵을 개발하든 남의 핵을 빌리든 한반도에 핵의 공포를 불러냈다. 이명박이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는 핵보유가 “김정일 일가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했다. 3대 세습에 대해서는 “북한을 위해서나 한반도 전체를 위해서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이명박의 무능에 대해 말할 때 이명박의 기분이 나빠지듯 그의 솔직한 발언 역시 김정일의 기분을 매우 상하게 할 것이 틀림없다. 이미 금강산은 닫히고, 개성공단은 존폐의 기로에 서면서,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데 김정일을 대결로 유도하고 대화의 길을 차단하는 그 말 한마디를 참지 못하고 꼭 해야 했는지 궁금하다. PSI 전면참여를 선전포고로 간주한다는 북한의 위협에 맞서 전면참여로 대남도발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는 전쟁할 테면 해보라고 배짱인 이명박의 호기롭고 통 큰 정책 덕분에 우리는 이제 북쪽 어디서 언제 미사일이나 포탄,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꽤 익숙해져 있다.

불안조성에 유능한 이명박정부

이전 정권은 적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북의 도발과 남북 충돌이 있었다 해도 그런 사태가 더 큰 불안과 위기로 발화하지 않게 관리하고 완충하는 체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에게는 북이 쏘면 우리도 쏜다는, 동물적 본능 뿐이다. 그게 아니면, 북한의 선의와 자비심을 믿고 도발하지 않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 지금 남북 군사적 긴장의 책임이 모두 이명박 정부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게 순전히 북한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해도, 왜 이명박 정부는 긴장을 푸는 일에는 그렇게 무능하면서 불안 조성에는 그렇게 능한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보수세력이 안보 하나는 잘할 거라는 오랜 믿음을 배신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텐데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불안을 키우고, 그것도 모자라 시민 사이에 불안감이 충분하지 않다고 안보불감증이니 하며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또 무슨 적반하장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런 불안선호증은 그들의 독특한 안보관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그들에게 평화는 곧 안보위기를 의미한다. 대결과 적대가 감소하고 좀더 안전해지는 상태를 그들은 안보위기라고 한다. 포용정책으로 남북화해가 진전되면서 남북대결을 서로 피하던 지난 10년이 바로 그런 안보위기의 시대였다. 반면 요즘같이 언제 북쪽에서 대포소리, 총소리가 날지 불안한, 평화위기의 시기는 안보의 시대이다. 그들은 이렇게 평화와 안보의 개념을 서로 맞바꾸었다. 그런데도 이 보수세력이 여전히 안보를 자신들의 강점으로 내세우도록 계속 놔둬야 할까.

지난 10년보다 더 큰 안보위기

안보는 산소와 같다고 했다. 안보는 산소처럼 중요해서 그것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누구도 산소 걱정을 하지 않으며 그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한다. 안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안보를 의식하지 않고 평화를 누리도록 하는 게 최선의 안보이다. 그러나 평화와 안보의 의미를 뒤집은 보수세력의 논리로는 핵과 첨단무기를 쌓아놓고도 불안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지금 한반도 정세가 불안한 것은 한·미연합군의 대량살상 무기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적의 때문이다. 냉전기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은 미·소의 핵탄두 숫자가 아니라, 그들 간의 적대였다. 탈냉전 후 미·러는 여전히 엄청난 핵무기를 갖고 있지만, 적대관계를 청산하면서 핵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남북, 북·미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그들이 주고받는 적대적 언어에 스며있는 적의가 바로 불안의 근원이다.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

덧글

댓글 입력 영역